반복과 축적, 그리고 만들어지는 회화
- 엘리정(Ellie Jung) 회화에 관하여
안나연 홍익대학교 미술학 박사 | 갤러리위 큐레이터 실장
엘리정의 회화는 무엇을 그리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쌓이는가에 관한 것이다. 그녀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지나 서사가 아니라, 물감이 축적되고 시간이 물질로 전환되는 과정이다. 화면은 완성된 결과라기보다 반복된 행위가 남긴 흔적이며, 그 과정이 응축된 하나의 상태로 존재한다.
작가는 붓 대신 짤주머니와 주걱을 사용해 물감을 짜고 펴며 화면을 구성한다. 이러한 방식은 단순한 기법의 변형을 넘어, 일상적 경험과 행위를 회화의 구조로 전환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반복되는 동일한 행위는 화면 위에 두께와 밀도를 형성하고, 그 축적이 곧 작품의 구조가 된다. 이때 반복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시간과 감각이 쌓이는 과정이며, 그 축적이 화면 위에 물질로 남는다.
이러한 점에서 그녀의 작업은 ‘표현’이라기보다 ‘형성’에 가깝다. 물감은 이미지를 설명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스스로 쌓이고 겹쳐지며 하나의 물질적 상태를 만들어간다. 색은 각각 분리된 요소로 존재하기보다 서로를 덮고 밀어내며 응집되고, 그 과정에서 화면은 평면을 넘어 작은 지형처럼 인식된다. 작품을 바라보는 경험 또한 이미지를 읽는 것이 아니라, 축적된 시간과 밀도를 감각하는 일에 가깝다.
〈산보〉 연작은 이러한 작업 방식이 공간 속에서 어떻게 확장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동일한 크기의 화면들이 나란히 놓이며 하나의 장면을 이루지만, 각각의 작품은 독립적인 리듬을 유지한다. 관람자는 이를 하나의 이미지로 파악하기보다, 화면 사이를 이동하며 경험하게 된다.
‘산보’라는 제목처럼, 이 작업은 특정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기보다 천천히 걷는 과정에 가깝다. 작가에게 산보는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반복되는 작은 행위들이 몸과 감각을 회복시키고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내는 시간이다. 이러한 경험은 화면 위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반복되는 걸음 속에서 미세한 변화가 쌓이듯, 그녀의 회화 역시 동일한 행위의 반복 속에서 조금씩 다른 감각을 만들어낸다. 그 차이들은 크지 않지만, 축적되며 하나의 풍경처럼 확장된다. 그 풍경은 하나의 장면이 아니라, 반복과 회복의 시간이 만들어낸 감각의 축적이다.
엘리정의 작업은 개인적인 경험에서 출발하지만, 그것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대신 그 경험은 반복과 축적이라는 방식으로 전환되어 화면 위에 남는다. 그래서 작품은 특정한 이야기를 전달하기보다, 보는 이로 하여금 각자의 시간과 감각을 환기시킨다.
결국 엘리정의 회화는 이미지를 그리는 일이 아니라, 시간을 쌓고, 행위를 축적하며, 물질을 형성하는 과정이다.
그녀의 회화는 장면이 아니라 상태이며, 그 상태는 지금도 쌓이고, 변하며, 계속해서 형성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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